이동 삭제 역사 ACL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r1 문단 편집) [오류!]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기울임취소선링크파일각주틀 === 반핵 운동 === >'''""if I had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상대성 이론|my formula in 1905]].""''' >'''""내가 만약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상대성 이론|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것이다.""''' >---- >'''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맨해튼 계획을 실시하도록 편지를 보낸 것에 후회하며.''' 세계 최초로 핵무기 반대운동을 시작한 인물들 중 하나. 아인슈타인은 1939년 8월에 [[독일]]에서 진행되고 있던 [[핵무기]] 연구에 위험성을 느꼈다. 여기엔 여러 가지 요인이 겹치는데, * [[엔리코 페르미]]와 실라드 등이 아인슈타인에게 독일의 핵무기 연구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그를 설득했다. * 또한 나치 독일에서는 체코 등지에 [[우라늄]]의 판매를 중단시켰다. * 과학계에서는 독일의 과학자(나치 소속 과학자라는 의미가 절대 아님)인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우라늄]]을 쪼개는 데 성공했다. 당시엔 '우라늄을 쪼갤 수 없다'는 반응이 대세였다. 쉽게 설명하자면 큰 원자핵에 작은 방사능을 쏘니까 못 쪼개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이 쪼개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 쪼개지는 과정에서 원자량의 일부가 에너지로 변환되는데, 그가 고안한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이 에너지가 '''[[다이너마이트]] 수백~천 톤의 폭발량''' 급으로 전환된다. 원자폭탄 이야기에 아인슈타인이 거론되는 이야기가 이 때문.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당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독일]]의 원자폭탄 보유에 대응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할 것을 권유하는 실라르드의 서한에 서명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맨해튼 프로젝트]]'''. 헌데 얼마 못 가 독일에서 핵무기 연구를 어이없는 방향으로 끌고 가거나 무산되는 등 [[삽질]]이 이어지자 아인슈타인은 ""이럴 거면 그냥 관둬도 되겠습니다""라는 식의 편지를 다시 보냈다. 그러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사망. 그리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후 그는 당시 서한에 서명한 것을 평생 후회하며 핵 무기 폐지를 지지했다. 특히 1955년 영국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과 대대적인 핵군축과 평화를 촉구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이 계기가 되어 전세계 과학자들이 과학적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핵무기 사용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군축과 세계평화를 논의하는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가 개최되었다. 이 모임은 21세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1회 회의는 1957년 7월 캐나다 퍼그워시에 10개국 22명이 참여하였다. 당시 방사능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핵실험 중지를 요구하였고, 매년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계속되고 있다. 과학적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핵과 각종 대량살상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안전책을 요구하고 있다. 따로 사무국은 없으며 개인참가형식이고 199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4년 한국에서도 개최되었다. 당시 60개국에서 모인 저명한 과학자 200여명이 참가했지만 언론의 무관심으로 그냥 묻혔다. 심지어 북에서도 사람이 왔는데...명색이 노벨상까지 수상한 단체의 행사인데, 노벨상이라면 환장하는(...) 대형 언론들이 지나가는 식으로 짦게 보도하고 넘어갔다.] 참고로 아인슈타인이 반전 운동을 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고 [[버트런드 러셀]]은 ""아인슈타인이 이해하지 못할 얘기할 때는 그를 현명하다고 하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를 하는 순간 그 사람에게서 지혜가 떠나버렸다고 생각한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다만 유념해야 할 것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핵투하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핵 개발에 후회하고 반대했다는 점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동정하거나 편드는 [[와패니즈]]가 되었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는데, 아인슈타인 박사는 전혀 [[그런 거 없다|그런 생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오해받는 사람 중에선 아인슈타인 외에도 핵무기의 개발자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가 있다. 원래 아인슈타인은 독일, 일본의 전쟁 범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핵개발 서한에 찬성한 것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이 핵개발을 반대하게 된 것은 정말로 개쌍놈들인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일본 지도층들은 안 죽고]] 무고한 민간인들만 잔인하게 죽은 것[* 일본 제국을 이끌고 한국 등을 식민지로 만든 건 일본 지도층들이었다. 물론 일반 일본 시민들이 한국인들을 차별했다는 등의 이유 때문에 일반 일본인들까지 죽어도 싸다는 의견도 있지만, 한국도 극우주의자부터 진보주의자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듯 일본인들도 마찬가진데 싸잡아 죽어라는 소릴 하는 사람은 딴 이유 필요없고 걍 유대인이니 죽으라고 한 나치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때문에 반대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일부 저서에서는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핵개발 과학자들이 [[일빠]]가 되었다는 등의 잘못된 정보가 실려있기도 하다지만 실제로 일본문화 같은 것에 심취했다고 한들 군국주의를 옹호한 것도 아닌데 딱히 문제될 건 없다. 오히려 아인슈타인의 언행을 보면 알 수 있듯 전체주의를 혐오하면 혐오했지 옹호할 이유가 없다. 참고로 당시 일본의 어느 반핵 운동가가 말년의 아인슈타인에게 핵개발의 책임을 따지는 편지를 보내 고뇌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는데, 나중에 NHK 다큐멘터리 팀이 아인슈타인 등신대 인형(...)[* 이 인형은 다큐멘터리 시리즈 내내 등장한다.]과 함께 늙어버린 그 운동가를 찾아갔더니 인형을 보자마자 ""내가 그 때 너무 심한 짓을 한 것 같다""며 엉엉 울었다고.(...) 냉전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인 1949년 Liberal Judaism의 알프레드 배너(Alfred Werner) 기자가 [[제3차 세계대전]]에 사용될 무기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 I know not with what weapons World War III will be fought, but World War IV will be fought with sticks and stones >저는 세계3차대전 때 뭘로 싸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계4차대전 때 나뭇가지와 돌맹이로 싸울 것이란건 알 것 같군요.[* 3차세계대전에서 문명은 다 망할 테니 4차대전은 석기 시대로 돌아가 저런 걸로 싸우게 된다는 의미.(...)] >출처 Liberal Judaism 16호 기사 중 im preview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함으로써, 사용자는 본인이 기여한 콘텐츠가 CC BY-NC-SA 2.0 KR에 따라 배포되며, 해당 콘텐츠에 대한 저작자 표시를 하이퍼링크나 URL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또한, 이 동의는 기여한 콘텐츠가 저장되고 배포된 이후에는 철회할 수 없음을 명확히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3.137.150.11)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